Category: 대안교육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쓰고 읽습니다

발도르프학교 1학년 한글 에포크 노트

   지난 주말 K는 처음으로 ‘숙제다운 숙제’를 받아왔다. ‘숙제다운 숙제’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 내준 과제들처럼 누가봐도 숙제라고 할만한 그런 것들 말이다. 글쓰기, 셈과 같이 방과후에 집에서 해야 했던, 노는 시간을 빼앗아 갔던 그런 숙제들 말이다.
   지금까지 K가 받아온 숙제는 방학때 자연속에서 충분히 놀기, 추석때 아빠한테 노래 가르쳐 주기, 뭐 이런 것들이었다. 여튼, 지난 주말 K가 받아온 숙제는 ‘엄마, 아빠, 동생의 이름을 예쁜 종이에 적어오기’ 였다. 요즘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한글은 기본으로 익혀가야 한단다. 게다가 영어, 산수 정도는 가르쳐 보내야 기죽지 않고 학교생활을 한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한 현실이다. K는 대안학교에 보낼 생각을 했었고, 대안학교에 보내지 않더라도 한글교육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을 것이라 확신했기에 미리 가르치진 않았다. 그렇다고 엄마, 아빠가 책을 읽어주는 와중에 스스로 글자를 깨치는 영특함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지금도 자기전에는 꼭 책을 읽어 줘야만 한다.
   K가 1학기 중에 배운것은 자음이 전부였다. 그림그리듯 자음을 그려보고 ‘ㄱ’, ‘ㄴ’, ‘ㄷ’의 모양이 숨어있는 물건들을 찾아 헤맸다. 의성어들을 통해 자음이 갖는 소리의 특성을 느껴보곤 했다. 2학기 들어서 ‘ㅏ’, ‘ㅜ’, ‘ㅣ’ 같은 모음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글자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책을 읽거나 길을 가다 아는 글자가 보이면 자랑스레 글자를 읽어 보인다. 또래 아이들이 1년전에 보였을 모습이라 생각하면 살짝 웃음이 난다. 하지만 조급해 지지는 않는다. 그 시기에는 빨리 읽고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발도르프교육의 읽기, 쓰기에 관한 소개글이다.

* 푸른숲발도르프학교 교육소위에서 번역한 자료입니다.

Literacy, Not Just Reading

발도르프 학교에서 언제 어떻게 읽기를 가르치는지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우선 발도르프 학교의 전체 교과과정이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발도르프 학교가 영적인 삶을 다시 일깨우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발도르프 교과과정과 교육이념(pedagogy)이 이 과업을 위한 실용적 도구가 되어 현대 삶 속에 자리한 물질주의의 경직되고 편협한 영향력에 정면으로 맞서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 역점을 둔 것 중 하나가 아이들 안에 상상력이 풍부한 사고 능력을 발달시켜 이를 바탕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목적이 분명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발도르프 교육을 미래를 위해 뿌려진 하나의 씨앗으로 보았던 것이다.

아이에게 평생 신어도 닳지 않는 단단한 강철 신발을 주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근시안적 방법을 쓰면 즉시 어려움에 처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필요라고는 없는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개념들을 제공하고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별 심사숙고도 없이 그저 아이들이 이런 파편화된 정보 조각들을 가지고 나아가 삶과 대면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기대한다. 그러나 진정한 지식은 이해에서 나오고, 이해는 경험에서 나온다. 아이의 발이 커지는 것처럼 경험과 이해, 지식도 살아가는 내내 변화를 거듭하며 자란다. 삶이라는 고된 길을 따라가는 동안 유연하게 발을 감쌀 수 있는 신발이야말로 훌륭한 신발이다. 그리고 신발이 닳아지면 애석하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며 옆으로 벗어 놓으면 된다. 반면, 계속 커지지도 안는 신발이 닳지도 않고 벗어 던질 수도 없다면 발은 불구가 되거나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될 뿐이다. 물질주의적인 교육, 정보 제공에 치우치는 교육은 이런 신발과 마찬가지이다. 대신 그러한 교육에서는 발을 다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불구가 되고, 나아가 감정을 사로잡아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사고가 지닌 능력까지도 심각한 상처를 입는다.

발도르프 교육이 언어 과목에서 지향하는 목표는, 모든 아이들에게 언어가 지닌 힘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는 것이다. 읽기 교육은 이런 언어 과목에 포함된 필수적인 부분일 뿐이다.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읽기에 대한 첫경험이 아이 스스로 살아있는 언어를 경험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발도르프 유치원에서는 다른 전통적인 학과목들은 물론이려니와 읽기 역시 가르치지 않는다. 유치원 시기에 아이 스스로 글 읽는 법을 깨우쳤다면 멋지고 훌륭한 일이다. 읽기를 억지로 배우지 못하게 막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가르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혼자 글을 깨친 아이들은 어른의 활동을 모방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임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건강한 일은 세상의 자연물들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아이들은 차츰 자연과, 그리고 동료인 인간에 대한 깊고 경건한 사랑을 키워 나간다. 활동, 즉 아이들 스스로 하는 활동과 아이들이 기꺼이 모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른의 활동이 기본이다. 노래 부르기, 역할놀이, 달리기, 뜀뛰기, 쌓고 허물기, 간단하지만 아주 필수적인 집안일하기,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법 배우기 등이 이 시기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들이다. 학과공부는 이후에 초등학교 과정에서 충분히 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서기, 걷기, 말하기와 마찬가지로 읽기도 저마다 자기만의 속도로 배운다.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깨우칠 수 있는 시기보다 일찍 서둘러 읽기를 배울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는 정서적으로든, 생리적으로든, 아니면 학업적으로든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때 이른 읽기 교육에 내몰리면서 나타나는 가장 안타까운 징후 중 하나가, 정상적인 능력과 지능을 가진 아이들 가운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텔레비전과 전자 오락물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 자기 속도에 맞추어 편안한 환경에서 배웠더라면 읽기를 잘 배웠을 아이들이 이제는 읽기 자체에 대해 깊은 반감이나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다. 교육을 끌고 가는 정치 세력들은 자기들이 내놓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아이들은 물론 교육과 사회 일반의 미래 행복에 얼마나 해로운 결과를 미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발도르프 교육의 읽기나 다른 과목 수업에는, 수업 방향이나 진도에 대해 엄격하게 시기별로 정해진 목표가 없다. 그런 목표들은 충분히 빨리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오히려 담임교사는 학습 내용이나 반 아이들의 다양한 기질, 성숙 정도, 학습 능력에 따라 폭넓고 유연하게 수업을 진행해 나간다. 시험을 위한 숙련도가 아니라, 상(그림)을 빚어내는 상상력을 키우고 배움 그 자체가 각 아이의 내면에서 살아있는 힘이 되는 그런 환경이 목표이다.

교사가 반 아이들에게 상상력이 넘쳐 나는 상들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제각각 이 상들을 개인적 경험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이런 개인적 경험이, 아이들이 열의를 가지고 건강하게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파편화된” 정보 조각의 산물이 아닌, 진정한 상상력에 기반을 둔 교육을 받고 자라난 아이들은 자신의 개념적 삶 속에서 유연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 삶으로, 삶의 그림으로 가득 채워진 교육이야말로 건강한 교육이며, 미래와 그리고 개인의 삶은 물론 인류의 문화·사회적인 삶 전체를 위해 뿌려진 씨앗이 된다.

이제 읽기와 읽기 수업으로 돌아가보자. 상을 빚어내는 발도르프 교육의 특징은 1학년에서 아이들에게 문자를 소개하면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읽기의 첫 수업들은 옛이야기(fairy tales) 속의 원형적인 도덕 이미지들로 시작한다. 마법을 부리는 뱀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교사가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뒤 아이들이 뱀 그림을 그린다. 뱀을 그리면서 구불거리는 뱀의 몸짓이 생겨난다. 그리고 나서 교사가 뱀(snake)이란 단어의 첫 글자(s)와 그림 속 뱀의 모습 에서 뱀이 내는 소리[s-]를 찾아 들려준다. 거기에서 비로소 ‘s’라는 글자가 등장한다. 자음의 원형적 소리와 그 현대적 재현 간에 존재하는 다른 상형문자적 관계들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오이리트미 교사는, 언어 오이리트미의 원형적 몸짓 속에서 이에 상응하는 언어의 이미지들을 창조해내는 작업을 통해, 담임교사의 작업을 지원하고 심화시킨다. 모든 자음이 일일이 이런 방식으로 제시될 필요는 없다. 아이들 스스로 얼마든지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음은 외부 세계의 이미지를 통해, 모음은 내적인 혼의 몸짓을 통해, 모든 문자들이 제시되고 나면 쓰기 교육을 시작한다.

읽기가 수동적인데 비해 쓰기는 능동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쓰기가 읽기보다 조금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사람들은 읽을 수 있게 되기 전에 쓰기부터 해야 했다. 발도르프 교육은 가능한 충실하게 인류의 의식(consciousness)이 발전해 온 과정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발도르프 교육의 읽기 교과과정은 사실상 쓰기 교과과정이며, 읽을 수 있는 능력은 쓰기 활동에서 생겨난다. 공책에 그린 표시들이 갑자기 이해되어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오는 그 깨달음은,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이다. 아이들은 교사가 지어낸 문장들을 옮겨 적어 아름답게 자기만의 책을 만들어 나가는데, 발도르프 교육은 이를 통해 아이들이 그 깨달음의 경험을 준비하도록 하며, 그럼으로써 아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경우보다 훨씬 더 읽기에 친숙해진다.

쓰기를 통해 읽기를 배울 때 아이들은 처음에는 상상을 동원하여 문자를 재현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간단한 문장 베껴 쓰기로 나아가고 나중에는 이야기 전체를 베껴 쓴다. 특히 1학년 시기의 목표는 이후 학년들에서 배우게 될 매우 까다로운 언어 교과과정을 뒷받침할 깊고 탄탄한 기초를 다지는 데 있다.

1학년 과정에서 아이들은 매일 시와 이야기를 접하면서 언어를 풍부하게 경험한다. 시는 기억력을 개발시키면서 동시에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훈련시킨다. 옛이야기들은 서사에 대한 감각을 개발시키면서 동시에 심오하고 원형적인 혼의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교사가 직접 지은 글을 칠판에 써놓으면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그대로 베껴 쓴다. 이런 교사의 글 속에는 자기 학급 특유의 요구들을 깊이 다뤄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다른 읽기 학습 교재들과 마찬가지로, 교사가 직접 쓴 글에서도 어휘와 구문이 제한되고 특정한 발음 유형이 강조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사가 쓴 글은, 살아 있으며 특정한 학급과 그 학급의 생생한 순간을 위해 창조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교과서도 이렇게 적합하게 딱 맞아떨어지기란 어려울 것이다. 아이들은 이런 종류의 글을 상점에서 산 선물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만든 선물을 받는 것처럼 여긴다.

이미 글을 터득한 채로 입학하는 1학년 아이들에게 과연 발도르프 교육이 어떻게 다가가는지, 그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지,수업을 지루해 하지 않는지 하는 등의 질문들이 자주 제기된다. 아주 좋은 질문들이다. 그에 대한 답은 부모가 발도르프 교육의 목표에 얼마나 열려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만약 부모가 학교를 회의적이거나 적대적으로 여기는 듯한 느낌을 아이가 경험한다면 아이는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런 부모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러면 아무리 훌륭한 교사와 함께 한다고 해도 아무런 혜택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상상력이 풍부해지기를 바라고, 이웃이나 친척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빨리 글 읽기를 배우지 않아도 좋다고 확신한다면, 아무리 학습적으로 앞서 나간 아이라 하더라고 발도르프 교육을 즐기고 그 혜택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 꼭 필요한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활동들에서 자양분을 받는다. 이런 활동들이 아이의 혼에 울림을 일으키며 삶에 목표와 유연성을 부여한다. 이런 것들은 양에 연연하는 정보 중심의 교과과정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2학년은 아이들 대부분이 자신이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발견은 가장 놀라운 형태로 일어난다.매일 쓰기 시간에 담임 교사는 그 날의 쓰기 과제를 읽는다. 아이들은 교사의 소리를 듣고 따라 읽는다. 놀랍게도 교사의 소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혼자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아이들이 하나 둘씩 생겨난다. 아이는 눈을 아래로 내려 자기 공책에 전날 적어 놓은 쓰기 과제를 보며 스스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로써 삶의 커다란 문지방 하나를 넘은 것이다.

3학년이 되면 자신의 공책과 함께 인쇄된 “진짜” 책을 읽는다. 2학년 때 인쇄된 읽을거리를 도입할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한 결정은 전적으로 담임교사의 몫이다. 하지만 3학년이 되면 인쇄된 책을 읽는 것이 읽기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또한3학년은 학생들이 각자의 공책에 각자의 말로 이야기를 써내려 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런 독립적인 작업을 2학년 때 처음 시작하기는 하지만, 3학년이 되면 언어 교과과정에서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 담임교사가 제시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학생들은 각자의 개별적인 목소리를 탐색해 나간다. 풍부하게 쓰는 학생들도 있고 신중하게, 혹은 유려하게 쓰는 학생들도 있다.중요한 것은 각자가 이전 학년에서 경험했던 서사와 인물(character), 묘사 등 모든 것들을 자기 안에서 끌어올려 그려낸다는 것이다.

4학년 이상이 되면 교사가 쓴 것을 학생들이 따라 쓰는 일이 매우 적다. 극히 축약된 정보나 양식적인 예시가 필요한 경우에만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을 쓴다. 이제 읽기는 각자의 일과에서 규칙적인 부분이 된다. 집에서 매일 읽기를 하고,말로든 글로든 읽은 책들에 대한 생각을 학급 전체와 지속적으로 나누는 과정이 진행될 수 있다. 작문과 문학과 더불어,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문법을 공부한다. 중등과정이 시작될 무렵이 되면 발도르프 학교의 아이들은 살아있는 언어에 대한 감각이 강해지고, 앞으로 이어질 학년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고 그 형식을 탐구하는데 필요한 훌륭한 기초를 가지게 된다.

언어능력과 관련하여 학습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 대해 중요하게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어떤 학급에서든 단순히 늦되는 정도를 넘어서서 언어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TV의 파괴적인 영향력에서부터 생리학적이고 언어심리학적인 장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아이들을 다루는데 있어 쉬운 해답이란 결코 없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든 간에 학생 본인과 교사 그리고 부모에게 반드시 필요한 세가지는 인내와 연민,그리고 노력이다. 근심하고 과잉보호하고 질질 끌면서 뒤로 미루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치원에서부터 교사와 부모는 아이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어떤 종류이든 학습장애의 징후가 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많은 유형의 검사 방법들이 있어서 우리가 평가를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진단결과들에 대한 평가가 때때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기초능력(basic skill)을 배워야 하는 아이가 분명 있지만, 치유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교정(remediation)에 기반한 정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항상 기억해야 한다.

발도르프 교육에서 이뤄지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술적인 작업들은, 정상적으로 보이는 아이들에게만 적합한 사치품이 아니다.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문화생활이 단지 경제적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교사와 가정이 서로 잘 이해하고 도와서 필요할 때 아이에게 보조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아이는 발도로프 교육이 주는 모든 선물들을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이해가 없다면, 학습적으로 조숙한 아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듯이, 학교와 가정 간의 상호관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것이다.

발도르프 학교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배움은 아이들이 지식에 대한 깊은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힘쓴다. 경험으로부터 이해가 생겨나고, 이해에서 사고가 자라난다. 모든 다른 과목들이 그렇듯이 언어 교과과정은, 상상력이 풍부한 경험을 통해 아이들 각자가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을 대면하는 데 필요한 힘과 신념과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시야(vision)과 사고를 키우도록 돕는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기계처럼 프로그램화되는 것에 저항한다. 굳어져 있는 정보는 우리를 무력하게 한다. 우리의 미래, 그럼으로써 우리의 자유까지도 도둑맞고 있음을 느낀다. 반면 발도르프 교육은 이러한 물질주의적인 교육의 반대편에 서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발도르프 교육의 핵심에 인간에 대한 영적인 상이 있으며, 읽고 쓰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교육 행위가 인류 의식의 진화 과정을 담고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책 표지 이미지

 

푸른숲발도르프학교 바자회에서 재미있는 책한권을 입수했다. 민들레에서 발간한 책들을 파는 코너가 있었는데 **아빠가 맡고 있었다. 바자회 내내 **아빠가 나를 따라다니는 기분을 느꼈다. 결국 사야만 했으리라. 그 분의 내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민들레에서 발간한 책이니 제도권교육에 대해 비판적일테고 교사, 부모의 성찰을 요구하는 책일 것이라 섣불리 짐작해 보며 그중 제목이 가장 섹시한(?) 책을 골랐다. 다행히 가격도 무척 저렴했다. 존 테일러 개토가 쓴 ‘바보 만들기’다. 부제는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 수록 멍청해 지는가’, 누가 붙였는지 참 멋지다. 한때 잘나가던 광고 카피라이터였다던 작가에게 부제를 요청했더라면 이정도 제목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는 광고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그 일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교직에 투신한다. 이후 30년간 교직을 지키며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교직사회에서 파격적인 행보라 하면 사실 관리자, 제도권, 허위에 대한 저항이라 봐도 좋을 듯 싶다. 조직화된 학교에서 자리 욕심을 버리고 아이들을 위해 투신한다면 충분히 파격적인 행보라 할만 하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런 교사에게 세번씩이나 ‘올해의 교사상’을 줬던 것을 보면 그의 행보를 반겼을 학부모와 교사, 학생들 그리고 극소수 관료들의 답답함이 어느정도 였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작가는 시종일관 근대 의무교육의 폐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작가가 내린 최종 결론은 중앙집권화된 의무교육의 사형선고다. 더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현재 교육제도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는데 너무도 잘 성공했기 때문에 이 시스템을 절대 폐기하지 못할 것이라 본 것이다. 나아가 제도권 교육의 붕괴를 위해 교육이 시장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경쟁할 것을 주문한다. 극단적인 처방이지만 어찌보면 현실적인 유일한 대안인지도 모르겠다. 세금을 학부모와 학생에게 돌려주고 교육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간섭하는 제도권 교육의 폐해는 많은 교육전문가,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라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의 경험을 통해 교육의 피해자인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과거의 상처를 또렷히 회상시켜 준다. 넘치는 위트로 제도권 교육을 옹호하는 저들을 비꼬기도 한다. 그래서 감동적이다.

작가가 제시하는 해법은 두가지다. 첫째, 교육을 우리의 삶속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 사회와 괴리된 채 학교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지금의 의무교육이고 아이들을 자기 삶의 이유를 모르는 기계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식민지시대 뉴잉글랜드 지역의 독립교회(조합교회라 해석하는데 어색해서)와 같은 자율적인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작가가 제시하는 이 방식이 사실 신선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발도르프교육 철학을 이미 접했기 때문이다. 작가가 주장하는 국가교육의 폐해와 그 해결책은 100여년전 루돌프 슈타이너가 제시했던 바와 거의 일치한다. 미국이 문제삼는 의무교육의 뿌리는 프로이센의 교육모델이었다. 독일의 근대교육이 미국으로 수출되고, 미국은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은 한국에 전수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당시 독일 국가교육의 폐해를 보고 독립적인 학교의 설립을 주장했다. 국가의 간섭, 경제로 부터 자유로운 학교, 공동체로 이루어진 학교가 발도르프학교이다. 작가인 존 테일러 개토의 주장을 지지하고 탈학교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다고 한다. 그들은 발도르프교육을 들어보지 못했을까?

분명한 것은 발도르프교육 또는 인지학과 관련된 서적보다 이 책 ‘바보 만들기’의 책장을 넘기기가 더 쉽다. 교육을 아이들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저들을 향해 ‘빅엿’을 날려주니 통쾌하다. 하지만 그 이후엔 공허함이 남지 않을까 싶다.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하지?

탈학교, 홈스쿨링, 대안학교, 그 문턱을 넘기가 이 나라에서는 너무 어렵다. 하지만 일단 그 문을 넘어서면 왜 그토록 고민했을까 싶다. 어리석게…

내겐 꿈이 있으니

노래 들어보기

푸른 하늘에 새들이 날개가 있듯이

이 작은 나에겐 꿈이 있어요

꿈이 내겐 날개죠

하늘을 나는꿈

꽃이 되는 꿈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꿈

그 무엇이든지 될 수 있어요

내겐 꿈이 있으니

이 노래 <내겐 꿈이 있으니> 는 큰아이 K가 ‘친구야놀자’ 어린이집에서 배웠던 곡이다. 집에 와서 이 노래를 곧잘 부르곤 했는데 처음 이노래를 듣고서 가슴에 북받치는 그 무언가를 느꼈었다.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에 이런 감흥을 받기는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 노래는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 졌을까. 아니면 어른들을 위해 만들어 졌을까.

인간은 본래 저마다의 삶의 계획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 계획을 실현시켜 줄 능력도 가진 채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 이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고 어른들이 해야 할 몫이다. 이는 발도르프 교육의 가장 중요한 철학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대안교육들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세상이 만든 틀, 세상이 정한 우선 순위가 아닌 자기가 부여받은 능력을 발휘하며 사는 것이 ‘인간다움’이고 ‘자유로움’이라는 것이다. 그 ‘자유’가 바로 ‘꿈’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싶다.

이 노래에 바로 그 철학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이 노래의 원곡과 만든 이를 찾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래를 만드신 김희동 선생님은 국내 대안교육의 역사와도 같은 분이다. ‘꽃피는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 교장으로 일해 오셨는데 아이들을 위해 많은 곡들을 남기셨다. 그런데 ‘꽃피는 학교’는 큰 아이 K가 다니는 ‘푸른숲발도르프학교’와 뿌리를 같이 한다. 학교 설립 이후 구성원들 사이에 학교의 철학과 관련하여 이견이 있었던 듯 싶다. 발도르프교육 철학과 교육과정을 그대로 도입하자는 주장과 이를 국내 전통 사상과 결합시켜 나가자는 주장이 대립하다 결국 학교가 갈리게 되었던 것이다. 김희동 선생님도 발도르프교육을 공부하고 지지했던 분이지만 후자를 원하셨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대안학교들이 더 많아졌으니 안타까워 할일 만은 아니다.

김희동 선생님의 노래들을 보면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분의 시선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다. 김희동 선생님이 푸른숲발도르프학교에 계셨더라면 얼마나 놀랍고 반가웠을까…

대안교육연대가 보수언론의 색깔공세를 규탄합니다


일부 보수언론의 대안교육 ‘좌빨’ 매도 공세를 규탄합니다

일부 보수언론들이 대안교육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마녀사냥식 색깔공세에 나섰습니다. 5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졸업식장서 北축사 읽고 간첩죄 8년 복역 교사도” (교사는 간첩죄, 학부모는 北과 연락 공유하는 학교 – 인터넷판)라는 선정적인 제목과 함께 늦봄문익환학교의 교사와 학부모, 교육과정 모두를 ‘좌빨’로 매도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부 보수언론사들이 줄지어 관련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아무런 확인과정도 없이.

기사를 쓴 동아일보 기자는 현장 취재를 하거나 자료 요청, 사실 확인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기사가 나가기 전 날, 의례적인 통보 형식의 전화만 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확인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내용을 교묘한 짜깁기와 맥락 자르기의 편집 기술로 확대 과장, 왜곡하여 보도하였습니다.

늦봄문익환학교는 평생 우리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하셨던 고 문익환 목사(호는 늦봄)의 삶과 얼을 기리고 배우고자 많은 시민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대안학교입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타인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평화를 사랑하고 환경을 살리는 세상을 꿈꾸며 행복하게 배우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경쟁 속에서 이기는 기술을 배우기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배웁니다. 소록도 한센병원 봉사활동, 남도 생태기행, 모내기와 추수, 흙집 짓기 등의 교육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대안교육은 그 동안 우리사회의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며 실천해 왔습니다. 경쟁보다는 협력을, 억압보다는 자유를, 맹목성보다는 창의성을 존중하며 삷과 배움이 하나로 연결된 교육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러한 성과들이 공교육에도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쳐서 제도 밖 대안교육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교육이 건강하게 변화하는 데 기여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늦봄문익환학교 또한 이러한 길에 함께 해 온 대안교육현장입니다.

따라서 작금의 일부 보수언론에 의해 자행하고 있는 늦봄문익한학교에 대한 색깔공세는 대안교육 전체에 대한 부당한 왜곡이요, 매도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분노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왜곡 편파보도를 한 동아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사들을 규탄하며, 작금의 행태를 중단하고 공식적인 사과, 정정보도, 반론 지면을 제공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2012년 05월 23일

대 안 교 육 연 대

대안교육연대 웹 사이트 바로가기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

지난 어린이날 고래교육연구소와 경향신문이 의미있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 이 그것입니다. 공동육아와 대안교육에 동참하고 있는 저로서는 그 약속들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행복해 지길 바라십니까?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길 원하십니까? 먼저 우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어른들이 달라져야 합니다.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 서명 동참하기

대안교육에 대한 대안이 있는 정당,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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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4일, 우리나라에도 녹색당이 창당되었다. 창당을 준비한지 넉달 만에 이뤄낸 성과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일본보다도 앞섰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다. 하긴 현재 일본은 54기의 원전중 1기 만이 가동중에 있고 이마저 곧 중단될 예정이다. 녹색당이 탄생하기도 전에 이미 탈핵을 이룬 셈이다.

녹색당이 추구하는 많은 가치들 중에서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녹색당이 내세운 청소년, 교육정책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교육은 공공재 이다.
  • 경쟁 위주의 교육을 지양해야 한다.(경쟁을 유발하는각종 차별의 철폐)
  • 교육 현장의 민주주의를 강화해야 한다.
  • 청소년의 인권, 자율권을 보장해야 한다.
  •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답은 없다는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을 잘 꿰뚫고 있다. 그리고 그 방향설정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구체적인 정책으로 풀어나가는 동안 많은 저항에 부딪힐 것이 분명하다. 사실 대선, 총선에서 교육정책을 다루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 한다. 워낙에 생각의 편차가 크고 이해관계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한민국의 여당, 제1야당에서는 교육정책 다운 정책을 선보이지도 못했다. 그저 정부 재정을 확대하여 보육비, 교육비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정도이다. 이런 것을 교육정책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교육을 백년지대계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정치인들은 교육문제를 화두로 꺼내기 싫어한다.

녹색당의 교육정책에서 더욱 반가운 공약은 제도권 밖의 교육, 대안교육에 있다. 대안교육에 대한 정책을 제시한 정당은 녹색당이 유일하다. 녹색당이 제시한 대안교육 정책은 다음과 같다.

  1. 제도교육 밖으로 나온 청소년들이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비용을 모두 자신 또는 가정에서 부담하게 됩니다. 이는 분명하게 형평성에 어긋나고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며, 제도교육에서 무상교육의 도입이 확대되고 있는 것과도 대조적인 상황입니다. 따라서 청소년들에게 직접 교육수당을 지급함으로써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겠습니다.
  2. 대안교육기관, 평생학습기관, 홈스쿨링 등 제도교육 밖 다양한 형태의 교육기관에 대한 재정 지원을 확대함으로써 보다 많은 청소년들이 배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습니다.
  3. 대안교육기관을 졸업한 학생들은 각 교육기관이 추구하는 바에 따른 교육과정을 이수하였음에도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형평성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학력에 따른 차별이 실질적으로 사라지기까지는 손해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방식의 교육 형태와 이를 통한 학력을 인정하도록 법제의 정비를 추진하겠습니다.
  4. 청소년들이 교육받을 권리가 보다 전면적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국가주도의 교육에서 청소년의 교육기본권이 보장되는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 전반적인 법제도의 개선과 지원 기관의 설치 등을 추진하겠습니다.
녹색당을 ‘풀뿌리정당’이라고 부른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시민들과 그 모임들이 더 큰 모임을 이루고 정당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책을 만들었다. 생협, 반핵운동단체, 환경운동단체, 종교단체, 비정규직노동자단체, 채식주의자 단체, 동물보호단체, 유기농민단체, 지역아동센터, 대안학교에서 조그만 마을의 주민들까지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그들이 희망하는 세상은 다르지 않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녹색당이 어떤 이미지로 비춰질지 잘 알고 있다. 1980년 서독에서 녹색당이 창당되었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녹색당의 19대 총선 공약 – 청소년과 교육

나는 왜 발도르프학교를 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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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발도르프학교 목공실에서

우리나라에서 대안학교를 선택하는 것은 자식에게 일체의 사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 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공교육에 비해 높은 학비는 제쳐두고서라도 주변의 편견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하지만 편견이라는 것은 진실된 모습이 아닌 제3자가 바라본 왜곡된 상일 것이니 개의치 않아도 좋으리라. 남의 인생을 들여다 보고 시시콜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이에 관한 것이다. 내가 아이의 앞날을 언제까지 염려해 주어야 할까. 내가 예측하는 앞날이 과연 현실이 될까. 내가 성인이 된 아이의 미래를 걱정해 준들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성인이 되기까지 기본적인 인성과 지식을 갖추게 하고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추게 한다면 더이상 걱정할 것은 없다.

나는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현재의 행복을 위해 대안학교를 선택했다. 많은 대안학교 중에서 발도르프학교를 선택하게 된 이유들을 정리해 본다. 10년이 지난 뒤에 나의 생각과 기대치는 어디에 머물러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일상의 톱니바퀴 속에서 허우적댈 때 나의 첫 마음가짐을 되새겨 보기 위함이다.

  1. 미래의 안정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희생시키지 않겠다.
  2. 끝없는 경쟁으로 치닫는 지금의 공교육, 인간을 재화로 바라보는 공교육을 반대한다.
  3. ‘교육은 사회에서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인간이 가진 고유한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곧 교육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라는 발도르프 교육 철학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4. 자연을 가까이 하고 인간도 그 일부임을 배웠으면 한다.
  5. 인간의 삶이 충분히 즐겁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6. 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스스로 갈길을 모색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7. 대학 진학이 인생의 필수 관문이라 생각치 않는다.
  8. 교육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끝없는 상호작용과 변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도 그 과정의 중요한 주체이기에 적극적으로 교육에 동참해야 한다.
  9. 대안적인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학교의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10.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서 살고 싶지 않다.
  11. 그리고…

대안학교는 귀족사립학교와 다른가?!

공교육의 문제점이 심화되면서 대안학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유명 대안학교들은 높은 경쟁률 때문에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공교육이 정상화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겠으나 대안학교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고 선택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자식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고자 하는 부모의 열망만으로 대안학교를 선택했다가는 후회하기 십상이다.

우선 대안학교가 어떤 곳인지 생각해보자. 대안학교라고 하니 당연히 대안교육을 실천하는 곳일테고 대안교육이라 하면 공교육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들을 해소하기 위한 교육일 것이다. 공교육에서 생기는 문제라면 입시위주의 교육, 주입식 교육으로 인한 사고력과 창의성 부족, 자존감 상실, 자율성 부족, 인성결여 등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대안학교들은 이런 문제인식에서 출발했으며 이를 풀어나가기 위해 교육 철학을 세우고 교육과정을 편성한다. 문제는 제도권 교육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이 단편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해소될 수 없다는데 있다. 만약 좋은 교육과정의 도입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면 공교육시스템 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개선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교육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학교라는 공간과 교육의 주체인 교사와 부모, 그리고 그 구성원들을 둘러싼 사회가 함께 변화해 나가야 한다. 현대의 물질만능주의, 경쟁지상주의의 허상을 깨닫지 못하고 참교육을 실천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따라서 대안적인 사회를 꿈꾸고 구성원 모두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교육을 실천하는 학교가 바로 대안학교일 것이다. 학교가 추구하는 목표가 공교육에 비해 높은 학업성과와 예체능교육이 전부라면 그 학교를 대안학교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소위 ‘귀족사립학교’라 불리우는 학교들이 이런 류의 학교들이 아닐까 싶다.

위키피디아에서는 대안교육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대안교육은 제도교육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를 구성하면서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려는 시도이다. 대안학교는 학교마다 서로 다른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교육목표와 학교의 운영에서 매우 상이한 모습을 보이지만, 모두들 철학과 영성을 중시하고, 소규모로 운영되며, 삶이 곧 학습이며 진정한 체험을 통해 ‘지,정,의’의 고른 영역의 교육을 균형있게 운영하려 하고, 학부모와 학생을 교육의 주체로서 교육활동에 적극 투입하고, 지역사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살아있는 교육을 실시한다.

우리의 교육이 30년전, 40년전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이들은 어른들의 뒤를 보고 자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른들의 탐욕과 위선들로 가득차 있다. 그 어른들이 어렸을 때 본 어른들의 뒷모습을 지금 우리 아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