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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학교의 통지표
K가 1학년 과정을 마치고 긴긴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발도르프학교에서 첫 통지표를 받았다. 그런데 부모인 내가 왜 이렇게 설레였을까? 세상의 모든 학부모들이 처음엔 다 그랬을 것이라고 위안을 해본다.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수치화된 성적이나 순위 따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대신 1년 과정을 마치면 아이의 학교생활, 발달상황 등을 기술한 통지표를 받게 된다. 나의 부모님은 교과목 별로 기재된 성적과 ‘ 수 우 미 양 가’ 와 같은 평가치, 그리고 반 석차를 보고서 학교생활을 짐작하셨겠지만 결국 성적얘기 뿐이었다. 좋은 성적을 받았으면 훌륭하게 학교생활을 해낸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내가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무엇에 관심을 보였는지, 어떤 배움에 어려움을 보였는지 알지 못하셨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말이다.
K의 통지표에는 신체발달 상황, 학교생활, 교과목별 활동내용과 성과, 종합평가가 수록되어 있었다. 부모로서 궁금해 하는 K의 학교생활에 관한 얘기는 학교생활과 종합평가에 담겨져 있었다. 매달 담임선생님과 만나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수업을 참관할 기회도 있지만 아이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게 된다. 지난 1년의 과정을 통해 아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선생님은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 앞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부모로서 이 조급함과 궁금증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다. 이런 번잡한 마음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발도르프학교 학부모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 싶다.
발도르프교육에 뜻이 있는 부모들을 위해 K의 사생활을 살짝 공개한다. K의 동의없이…
작은 체구에 투명하게 하얀 피부를 가진 K는 1년 사이 많이 자랐습니다. (중략) 환한 표정으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K는 가방을 사물함에 정리하는 것보다 교실과 친구들에게 늘 관심이 가 있었습니다. 가방은 사물함 앞에 놓아 둔 채로 친구들 사이에 들어가 이런 저런 이야기나 관심거리들을 나눕니다. 그래서 얘기를 한번 해주면 뭔가 아쉬운 듯이 와 재빨리 가방을 정리합니다. 아침 열기 전 손잡고 인사를 나눌 때 어찌나 마음이 급한지 인사가 끝나자마자 얼른 손을 빼가던 K는 지금은 조금 여유를 가집니다. (중략) 교실 질서와 흐름 속으로 K는 참 천천히 들어왔습니다. 초를 켜고 고요히 아침을 열고 시를 바르게 서서 함께 낭송하는 시간이 K에게는 쉽지 않았습니다. (중략) 2학기에도 그런 K의 모습은 조금 남아있지만 좀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어떤 질서 속에서 흐름을 타고, 경계에 인식을 가지는 것에 아직은 어린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의 흥미와 관심을 친구들에게 표현하기를 좋아했고 그래서 발표를 정말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조용히 손을 들고 기다리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발표에 대한 강한 열망을 언제나 표현하는 편이었고 자신의 차례가 되지 않을 때 아쉬움도 자주 표현했습니다. 수업시간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관련된 이야기가 있으면 자주 표현함으로 흐름이 끊길 때가 있습니다. 그럼 아이들도 그 이야기에 꼬리를 물고 교실이 이야기장이 됩니다. 그럴 때에도 손을 들고 이야기 하도록 지도를 합니다. (중략) 공책 작업을 할 때도 자신 안에 있는 다양한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하는게 아닌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하는 것과 조용히 자기 공책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제 의도 속에서 많이 부자유스러워 했습니다. 리코더를 부는 것을 어려워 했습니다. 손이 작긴 하지만 손가락에 있는 소근육들이 연습이 되면서, 호흡도 차분하게 되면서 리코더 소리를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운동장으로 나가 활동적으로 움직입니다. 나들이나 소풍을 갔을 때도 자연 속에서 많은 것을 발견하고 보여주는 호기심이 많고 에너지가 넘치는 K는 이제 막 하늘을 날기 시작한 아기새 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 아기새가 조금씩 세상을 경험하면서 경계와 질서를 알아가는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